[김용택 칼럼] 사람들은 왜 권력 앞에 서면 작아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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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 칼럼] 사람들은 왜 권력 앞에 서면 작아지는가?
  • 김용택 참교육이야기
  • 승인 2018.06.19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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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세계여성지도자)도 다 나름대로 성공한 정치인이지만, 그러나 대부분 육중한 몸매를 자랑하고 튼튼한 거구를 자랑하는 분들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대통령님께서는 여성으로서 미와 그리고 모성애적인 따뜻한 미소까지 갖고 계십니다. 이럴 때 박수를 안치는 분들은 사상이 불순하지 않나 싶습니다.’

2016년 3월 3일 서울 코엑스 ‘국가조찬기도회’에서 새에덴교회 소강석 목사가 박근혜대통령을 두고 한 말이다.

소강석목사가 이런 용비어천가를 그것도 본인이 곁에 앉아 있는 자리에서 부른 것은 속이 보이는 소리다. 그가 평소 박근혜대통령을 무엇 때문에 얼마나 좋아 했는지 모르지만 이런 말을 그것도 다수의 대중에게 하는 것은 인격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이 하는 말로 들리지 않는다.

디지털시대를 거쳐 4차산업혁명시대를 살면서도 아날로그시대 가치관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 공사를 구분 못하는 사람들이 그렇고 사회적 지위와 개인의 인격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렇다.

일등지상주의 일류학교가 목표인 교육을 받은 탓일까? 일등에서 꼴찌까지 한 줄로 세우는 성적중심 교육의 후유증일까? 사회적 지위와 인품을 구분하지 못하는 반민주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이 있다.

지위란 ‘개인의 사회적 신분에 따르는 위치나 자리’다. 역할이란 ‘자기가 마땅히 하여야 할 맡은 바 직책이나 임무’를 뜻하는 말이다. 개인의 사회적 지위는 그 사람의 인품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결정된다. 

평사원으로 입사한 사람이 계장, 과장, 부장… 으로 승진하는 것은 그 인격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그 사람이 맡은 업무능력에 따른 반대급부다.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나 역할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에 따라 달라진다.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개인이 이기적인 삶을 사는가 아니면 다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사는가의 차이에서 매겨지는 평가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혹은 도지사와 같은 사회적 지위 때문에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자유한국당의 홍준표라 사람은 국회의원 수가 112석이나 되는 대한민국 제1야당의 대표였다. 그가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끝내 6월 지자체단체장 선거가 끝나기 바쁘게 사표를 던지고 물러났을까?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 존경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사회적 지위가 높다고 꼭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인 아닐텐데 많은 사람들은 사회적 지위 앞에 작아지는 것은 왜 일까?

민주적인 의식이나 시각을 가진 사람은 인간의 존엄성을 최고의 가치로 본다. 그것은 사회적 지위가 아닌 인간 그 자체로 존엄성을 가진 존재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오랜 세월동안 계급사회가 남긴 유산 때문에 ‘지위가 높은 사람=훌륭한 사람’으로 인식해 왔다. 이명박대통령이나 박근혜대통령은 헌법이 보장하는 최고의 지위를 맡았지만 지금도 그를 훌륭한 사람으로 존경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소강석 목사는 박근혜대통령을 진심으로 존경했는지 아니면 용비어천가를 부른 것인지는 모르지만 대중 앞에서 그런 말은 자신의 비열한 아부근성을 노출한 추태로 보인다.

물론 문재인 대통령처럼 집권 1년이 지난 대통령의 지지율이 80%에 육박하는 것은 문대통령이 지위에 다른 역할을 잘하고 있어 받는 보상이다. 그렇다고 그가 인격적으로 훌륭하다고 평가를 받을지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도 있다. 개인의 가치관은 그 사람 개인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학문은 높고 덕망이 높은 저명인사들, 그들은 온갖 요사스러운 궤변으로 대중을 현혹 하는데 이에 대항해야 할 언론은 권력의 강간을 당했다. 신문과 방송, 출판과 표현의 자유는 목을 졸렸다. 단말마의 신음소리가 사회에 가득하다.

이른바 ‘언론인’들이라는 많은 직업인들이 그 직업적 자리를 이용해서 권력의 시녀가 되어 알몸으로 아양을 떨고 있다. 화간(和姦)이라 하기에조차 너무나 구역질나는 타락이었다.’

정의가 실종된 사회, 청년이 분노할 줄 모르는 사회, 멘붕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용비어천가를 들으면 우리시대의 스승 ‘리영히선생님의 죽비’ 소리가 더욱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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