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의 웹자서전] ep.18 수면제 20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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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의 웹자서전] ep.18 수면제 20알
  • 충청메시지 조성우
  • 승인 2021.12.27 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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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목 통증으로 밤새 끙끙 앓는 날이 많았다. 하지만 치료 받을 길은 요원했고 치워야 할 쓰레기는 끝도 없이 나왔다. 밤새 쓰레기를 치우고 오면 나는 젖은 박스처럼 구겨져 잠이 들었다.

​어느 날 잠결에 엄마와 아버지가 하는 얘기가 들렸다.

“재맹이가 저러다 평생 빙신이 되머 우야니껴?”

“돈 벌어서 수술하머 될끼라.”

“집 살라꼬 모다논 돈으로 아 수술부터 시키야 되잖겠니껴?”

엄마의 말에 의식이 또렷해졌다.

“그 돈은 아무도 손 못 대.”

​엄마와 아버지의 말이 머릿속에서 수없이 재생됐다. 한창 예민한 열일곱 살이었다. 가난은 아득해 보였고 한 팔을 못 쓰는 사람이 되어서도 살아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온갖 절망적인 생각이 나를 삼키고 있었다. 눈물이 베개를 적셨다.

​마침내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대학입시도, 팔을 고치는 일도 부질없어 보였다. 열심히 살아 교복도 한 번 입어보고 성공한 모습도 보여주고 싶었지만 불가능한 꿈이란 생각이 들었다.

​엄마에게 얼마간의 돈을 달라고 했다. 수면제와 연탄을 사야 했다.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을까? 엄마는 돈을 주면서 버릇처럼 입에 달고 살던 말을 다시 반복했다.

​“재맹아, 마음 단디 먹어야 된데이. 니는 크게 될 거라고 그랬제?”

​엄마의 말이 아프게 가슴을 찔렀다.

​다락에 연탄불을 피우고 수면제를 먹었다. 잠은 쉬 오지 않았다. 세상과의 영원한 작별이었다. 슬프기도 했지만 홀가분하기도 했다.

​얼마가 지났을까? 나는 멀쩡하게 눈을 뜨고 다시 깨어났다. 연탄불은 꺼져있었고 정신은 말짱했다. 공장 친구들은 그 정도면 죽는다고 했는데... 수면제가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다시 기회를 보기로 했다.

​그즈음 오리엔트 공장에서 사람을 뽑았다. 아버지가 원서를 내라고 했다. 어차피 죽기로 한 마당이니 못할 것도 없었다. 취업이 안 될까 걱정됐던 아버지는 빽을 쓰기로 한 모양인지 오리엔트 수위장에게 3천원을 갖다 바쳤다. 돈이 아까웠지만 그렇다고 아버지에게 내일 죽어버릴 거란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다시 약국에 들렀다. 또 수면제를 달라고 하면 이상하게 여길 듯해 이번에는 동생 핑계를 대고 수면제 20알을 샀다. 약사가 잔소리가 많았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유서를 썼다. 엄마에게 미안했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어 보였다. 너무 지쳤다고 말하고 싶었다. 눈물 때문에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았다.

​다시 연탄불을 붙이고 꾸역꾸역 수면제를 삼켰다.

 

[이재명의 웹자서전] ep.19 약사의 잔소리

 수면제를 20알이나 먹었지만 정신이 말똥말똥했다.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 두 번이나 그러니 이상했다.

그때 별안간 다락방 문이 열렸다. 매형이었다. 매형은 연탄불을 보고는 상황을 금방 눈치챘다.

​“처남, 오늘 오리엔트 면접날인데 왜 이렇게 누워있어?”

​매형은 짐짓 연탄가스가 가득 찬 다락방 상황을 모른체했다. 그리고는 공장까지 따라오며 괜한 우스개를 늘어놓았다.

​오리엔트에 도착하니 면접 볼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수위장이 사무실로 들어가게 해주었다. 아버지가 수위장에게 건넨 3천 원이 효능을 발휘하는 모양이었다.

머뭇거리고 있는데 문득 매형이 내 굽은 팔을 어루만졌다.

​“내가 처남 팔 고쳐줄게. 걱정하지 마.”

​누나네는 우리 집보다 더 가난했다. 변변한 직업도 없이 과일행상을 하는 매형에게 그럴 돈은 없었다. 그래도 그렇게 말해주는 매형이 눈물겹게 고마웠다.

자꾸 눈물이 나려 했다. 그즈음 나는 툭하면 눈물이 났다.

​오리엔트에 결국 합격했다. 그건 대학진학의 완전한 포기를 의미했다. 돌아보지도 않을 생각이었던 오리엔트에 나는 고개를 숙이고 다시 들어갔다. 삶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수면제를 먹었는데도 왜 잠들지 않았을까? 나는 이윽고 약사에게 속았음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20알씩이나 먹고서도 멀쩡하게 면접을 보러 갈 수는 없었다. 웬 어린놈이 수면제를 달라하니 상황을 짐작한 약사는 소화제 같은 것을 잔뜩 줬던 것이다.

​동네약국의 그 약사를 생각한다. 약사는 폭풍 잔소리를 해댔지만 어쩌면 속으로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얘야. 서럽고 억울하고 앞날이 캄캄해 죽을 만큼 힘들어도, 삶이란 견디면 또 살아지고, 살다보면 그때 죽고 싶었던 마음을 웃어넘길 수 있을 만큼 편안하고 좋은 날도 올 거란다. 그러니 힘을 내렴.’

​결국 우리를 살게 하는 건 서로를 향한, 사소해 보이는 관심과 연대인지도 모른다.

약사는 처음 보는 나를, 세상 슬픔은 다 짊어진 듯한 표정으로 생을 끝장내려고 하는 소년을 모른 척하지 않았다. 팔을 고쳐주겠다던 내 가난했던 매형의 말도 진심이었을 것이다.

​누구도 홧김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지는 않는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세상이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생이 벼랑 끝에 몰릴 때, 듬직하게 기댈 수 있는 사회이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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