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웹 자서전, 가난했던 소년공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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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웹 자서전, 가난했던 소년공 시절
  • 충청메시지 조성우
  • 승인 2021.11.18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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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살, 목걸이 공장, 열두 시간의 노동
◇가난하다고 사랑을 모르겠는가
◇아버지와의 전쟁, 그 시작
◇내 몸, 백 개의 흉터

◇열세 살, 목걸이 공장, 열두 시간의 노동

초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3년 전 앞서 성남으로 올라간 아버지를 따라 나머지 가족도 모두 상경했다. 1976년 2월이었다.

​당시 성남은 서울의 빈민가와 판자촌 철거로 떠밀린 주민들이 모여 살던 도시였다. 우리 가족은 화전민의 소개집에서 성남 상대원동 꼭대기 월세집으로 옮겨갔다.

​이사할 때 내 손에 들린 짐은 책가방이 아니라 철제 군용 탄통이었다. 탄통 안에는 몽키스패너와 펜치, 니퍼가 담겨 있었다. 자전거를 수리하기 위한 도구와 부품들이었다. 당시 나는 자전거 수리에는 도가 터 있었다.

​자전거를 보면 지금도 가슴이 설렌다. 사람 힘만으로도 굴러가는 그 얇고 둥근 두 개의 바퀴라니... 페달을 밟으면 세상이 내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어쨌든 내 출신성분은 공구로 가득했던 그날의 이삿짐만 보아도 분명했다. 시쳇말로 흙수저도 못되는 무수저. 당시 중학교도 못 다닐 정도의 집은 흔치 않았지만 우리집 형편은 그랬다. 더 이상 학교 다닐 일은 없었다.

​열세 살, 월세집 뒷골목 주택에서 목걸이를 만드는 가내공장에 취직했다. 연탄화덕을 두고 빙 둘러앉아 염산을 묻힌 목걸이 재료를 연탄불 위에서 끓는 납그릇에 담가 납땜하는 일이었다.

​종일 연탄가스와 기화된 납증기를 마셔야 했는데, 그러면 얼굴이 달아오르고 속옷이 흠뻑 젖었다. 늘 머리가 띵하고 어질어질했는데, 그때는 그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유해물질인지 알지 못했다.

​월급은 3천원. 쌀 한 가마니 값이 조금 안 됐다.

​얼마 후엔 월급 만 원을 준다는 두 번째 목걸이 공장으로 옮겼다. 맞은편 창곡동으로 약 3~4킬로미터를 걸어 출퇴근 했는데 작업환경은 더 나빴다. 하지만 만 원이 어딘가! 아침 8시 30분에 출근해 밤 9시까지 하루 12시간을 일했다. 일이 밀리면 더 늦기도 했다. 퇴근길 9시 25분이면 전파사에서 흘러나오던 ‘내 마음은 호수요’로 시작하는 가곡이 지금도 귀에 들린다.

​점심은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먹었고 집에 와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파김치가 되어 귀가하면 엄마가 밥상을 내왔다. 엄마는 밥그릇에 얼굴을 묻고 허겁지겁 밥을 먹는 나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힘들었던가? 나는 자기연민에 빠질 틈이 없었다. 시장통 공중화장실을 청소하고, 휴지를 팔고 소변 10원, 대변 20원 이용료를 받던 어머니와 여동생이 더 아팠다.

​맞다,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해주던 엄마는 그런 일을 했다. 엄마는 잠시도 자리를 비울 수 없어 끼니도 화장실 앞에서 때웠다. 집에서는 시멘트 포대를 털어 봉투를 접어 팔았다. 그런 엄마가 가여웠고 그런 엄마를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 안달했다.

​열악하다는 말도 사치스럽던 공장, 장시간의 노동, 내 마음 아픈 구석이던 엄마와 동생들. 그 시절의 풍경과 그 구석구석의 냄새는 내 뼈에 새겨져 있다. 그런 건 세월이 흐른다고 지워지지 않는다.

​잊히지 않는 아니 기억하려 애쓰는 삶의 경험 때문에 가진 게 없는 이들에게 이 세상이 얼마나 가혹할 수 있는지 안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극단적 선택을 하는 수많은 누군가의 사연을 들으면 한없이 조급해지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덜 가진 사람, 사회적 약자에게 우리사회는 따뜻한 울타리가 되어주어야 한다. 그런 이들을 아끼고 보살피는 공동체여야,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정글이나 헬조선이 아닌 행복한 보금자리일 수 있다.

​지금 내가 하려고 하는 일, 하고 있는 일 모두 그 연장선에 있다. 그 일들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어서 치열할 수밖에 없고 포기할 수도 없다.

◇가난하다고 사랑을 모르겠는가

석 달 치 밀린 월급을 받기로 한 날이었다. 달뜬 마음으로 평소처럼 4킬로미터를 걸어 창곡동 목걸이 공장으로 출근했다.

​하지만 공장문이 닫혀 있었다. 상황 파악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장이 직원들 월급을 떼먹고 야반도주를 한 것이었다.

​밤 9시가 넘어 퇴근 하던 길을 벌건 대낮에 터덜터덜 걸어 돌아왔다. 하루 12시간, 90일치의 노동이 가뭇없이 사라져버렸다. 요즘처럼 신고해 도움 받을 길도 없었다. 게다가 나는 열세 살, 취업연령 미달에 이름도 남의 이름을 빌려 다니던 중이었다.

​“엄마!”

엄마는 집에서 부업으로 북어포를 찢고 있었다. 엄마를 보는 순간 갑자기 눈물이 솟구쳤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억울함이 몰려왔다.

​놀란 엄마가 뛰어나와 나를 안으며 토닥였지만 내 울음은 오히려 더 커졌다. 이제 돌아보건데 아마도 엄마가 더 아프고 억울하고 슬펐을 것이다.

​다시 동마고무라는 콘덴서용 고무부품 공장에 취업했다. 모터로 회전하는 샌드페이퍼 연마기에 사출기로 찍어낸 고무기판을 갈아내는 일이었다. 소위 ‘빼빠’치는 것이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손바닥이 닳고 지문이 사라지더니 피가 흘러나왔다.

​야근은 밤 10시, 철야는 새벽 2시. 철야 하는 날이면 통금시간 때문에 새벽 4시까지 공장바닥에서 자다가 귀가했다. 통금해제까지 잠이 안 오면 노래를 배우거나 얘기를 나누며 시간을 때웠다. 그때 강원도 출신 꼬마노동자(그는 놀랍게도 나보다도 나이가 어렸는데 지금은 이름을 잊어버렸다)에게 배운 최초의 최신 유행가가 하남석의 ‘밤에 떠난 여인'이다.

​하루는 연마기에 손가락이 말려들어갔다. 부실한 치료 덕에 내 왼쪽 중지 손톱에는 지금도 검은 고무가루가 남아 있다. 산업재해로 치료받는 기간에는 월급의 70%를 준다는 법 같은 건 알지도 못했고 회사에서도 그럴 마음은 전혀 없었다.

​월급을 받기 위해 왼손에 깁스를 한 채로 공장에 나가서 남은 한 손으로 일했다. 한손으로 일하는데도 월급을 다 준다는 것이 오히려 고마웠다.

​“재명아, 깁스 푼 다음에 나가라. 손이 남아나질 않겠다.”

​하지만 엄마는 나를 말리지 못했고 대신 나와 출퇴근길을 동행하는 것으로 안타까움을 대신했다. 밤늦은 시간까지 공중화장실에서 일하다가 공장으로 데리러 왔고, 철야 하는 날이면 새벽 4시에 데리러 왔다. 그건 가진 것도 힘도 없는 엄마가 어린 아들에게 준 최고의 사랑이었다.

​세상이 모두 잠든 새벽에 엄마와 둘이 상대원동 비탈길을 오르면 숨도 차고 힘들었지만, 잡은 엄마 손을 발걸음에 맞춰 신명나게 흔들며 나는 행복했다. 엄마와 함께라면 길고 긴 하루의 고된 노동은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 엄마 손은 언제나 따뜻했다.

​섣달그믐날처럼 차가운 삶을 견디게 하는 것은 그런 온기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가난하다고 사랑을 모르겠는가.

◇아버지와의 전쟁, 그 시작

공장으로 출근하는 길, 교복 입은 아이들을 보면 부러웠다. 교복 칼라는 아침햇살을 받아 하얗게 빛났고 아이들의 가방 속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세상이 담겨 있었다. 나와는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아이들이었다.

​나는 잿빛 작업복 차림이었다. 수다를 떨며 활기차게 등교하는 학생들을 거슬러 공장으로 가는 길은 힘들었다. 가급적 그들과 마주치지 않는 골목길을 찾아다녔다.

​하루는 공장에 교복 입고 출퇴근하는 아이를 발견했다. 뭐지?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알아보니 고등공민학교에 다니는 학생이었다. 내 안에서 뭔가 ‘반짝’ 빛났다.

​“아버지, 저도 야간학교에 들어갈래요.”

​집에 돌아와 아버지에게 말했다. 희망 같은 걸 언뜻 본 듯한 흥분이 나를 감싸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입만 바라보았다.

​“야간학교는 정규학교가 아니어서 3년 다니고 다시 검정고시 봐야 한다.”

​아버지는 승낙하지 않았다. 돈벌이로 공장이나 다니게 하려고 공부를 막는다고 나는 단정했다.

​아버지와의 길고 깊은 갈등의 시작이었다. 이때부터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나는 오직 ‘공부하기 위해’ 아버지와 싸워야 했다.

​아버지는 중퇴긴 하지만 대구에서 고학으로 대학공부도 했던 사람이었다. 교사나 순경도 했었지만 외아들이라 부모님을 모시려고 고향으로 돌아올 만큼 효자였다. 대신 농사일은 하나도 할 줄 몰랐다.

​그러던 아버지가 성남으로 상경한 뒤로는 완전히 바뀌어 수전노가 되어 있었다. 악착같이 일하고 지독하게 모았다. 집에는 돈 버는 사람만 있고 쓰는 사람은 없었다.

​아버지는 어떤 계기로 그렇게 변했을까? 재영이 형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안동양반 출신이에요. 젊은 시절엔 자기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도리를 다한다는 식의 선공후사 같은 도덕의식이 있었어요.

동네일은 공짜로 다 해주면서 곧이곧대로 살던 사람이었죠. 자기가 가진 지식과 돈, 시간을 다 남을 위해 썼던 거예요.

​그런데 그 결과가 뭐였냐? 성남에 와서 아버지는 체면과 명분, 공부, 이딴 거 아무 소용없다, 거지를 면하려면 악착같이 돈을 모아야 한다, 그렇게 결심한 것 같아요.”

​아버지에게도 아버지의 사연이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맘 같지 않은 세상에 상처받은 후로, 원래의 자신을 부정하며 살았는지도... 어쩌면 아버지는 평생 화가 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열네 살 아들이 공장에 다니며 야간학교에 가겠다는 걸 막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권위적인 아버지를 둔 세상의 모든 자식들이 그렇듯 내게도 아버지는 언젠가 넘어야 할 산이었다.

​야간학교에 가지 말라는 말을 들은 날, 이불을 뒤집어쓰고 오래 울었다.

◇내 몸, 백 개의 흉터

빙과류 판매용 냉장고를 만드는 아주냉동으로 공장을 옮겨 철판을 접고 자르는 일을 맡았다. 거대한 샤링기에 철판을 올리고 페달을 밟으면 순식간에 단두대 같은 날이 떨어지며 두꺼운 철판도 가위 속 종이처럼 가볍게 잘렸다.

​동마고무에서 매일 아들의 손바닥에서 핏자국을 봐야 했던 엄마의 조바심 때문에 공장을 옮긴 것이었는데, 오히려 더 위험한 곳으로 간 셈이었다.

​아주냉동에서는 출근하면 군복 입은 관리자가 군기 잡는다고 줄을 세워놓고 소위 ‘줄빳따’를 때렸다. 줄줄이 엎드려뻗쳐를 한 채로 엉덩이를 맞았다. 불량이 많이 난 날에도 빳따를 맞았다. 퇴근할 때는 군기를 유지한다며 공장문을 나서기 전 또 때렸다. 인권 같은 건 책에나 있는 얘기였다.

​“어!”

어느 날 옆에서 절단 작업을 하던 고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고참의 시선이 가닿은 곳에 무언가 떨어져 있었다. 꿈틀거렸던 것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사고를 당한 고참이 어어, 하더니 희죽 웃으며 그것을 얼른 집어 들었다. 그는 이미 두 번의 손가락 사고를 당했던 사람이었다.

​고참은 봉지에 손가락을 담고 작업장을 뛰쳐나가면서 그때서야 비명을 질렀다.

​나는 완전히 얼어붙은 채로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았다. 희죽, 웃던 고참의 얼굴이 눈앞에서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샤링기는 날이 예리해서 사고가 나도 첨엔 잘 몰라. 그냥 차갑고 서늘하지. 손을 들어보고야 아는 거야.”

​누군가 내 귀에 소곤거렸다. 그날 밤 나는 긴 악몽을 꾸었다.

공장문은 출근과 동시에 굳게 닫혔다. 퇴근 때까지 점심시간이라도 공장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공장문을 확 밀고 나가 앞산에 흐드러지게 핀 진달래를 실컷 따먹고 싶었지만 그건 불가능한 소망이었다.

​그곳에서 의지할 것이라곤 나와 같은 처지의 소년공들뿐이었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채 시골에서 올라와 산업역군이란 거창한 이름의 공돌이가 된 아이들.

​언젠가부터 나는 엄마에게 도시락 하나를 더 싸달라고 했다. 자취를 하며 점심을 굶는 아이들과 나눠 먹기 위해서였다. 엄마는 흔쾌히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어느 날부터 다른 소년공들도 각자 도시락을 꺼내 나눠 먹기 시작했다. 별것 없는 뻔한 반찬에 딱딱하게 식은 밥.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나눠 먹는 그 시간만큼은 즐거웠다. 함께 나누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었다.

그 공장에서도 함석판을 자르느라 수없이 찔리고 베였다. 그 후에도 끊임없이 눌리고, 떨어지고, 꺾이고, 소음과 유독약품에 노출되었다. 덕분에 내 몸에는 그 시절의 흔적이 남았다. 아마 백 개도 더 될 것이다.

​내 몸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건 지문처럼 남아 나의 처음이자 끝, 전부를 이룬다.

​소년공이었던 아이들, 그 가난했던 아이들의 말간 슬픔이 여전히 내 안에서 찰랑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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