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탐방] 한훈 선생 손자 한상빈씨 삶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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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방] 한훈 선생 손자 한상빈씨 삶의 이야기
  • 충청메시지 조성우
  • 승인 2021.08.30 09: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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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립운동이 죄가 된 역사적 배경
2. 애국지사 한훈 선생을 내조한 유응두 여사
3. 애국지사 후손 한상빈씨의 모범적인 삶
4. 할머니의 유지를 받든 한상빈ㆍ남은신 부부, 나눔의 세월

본지는 “[역사의 인물] 계룡의 자랑스런 애국지사, 한훈 선생”에 이어 자손들의 삶에 대해 조명한다. [편집자 주]

 

1. 독립운동이 죄가 된 역사적 배경

독립운동에 참여한 애국지사나 그 자손들은 왜 일제강점기보다 해방 후에 더 위험하고 가혹한 역경의 삶의 살아야 했을까? 참,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일제청산이 되지 않은 정치적 산물로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에게 본인들도 모르는 주흥글씨가 새겨졌다. 친일 부역자들이 정치세력으로 전면에 부상하면서 자신들의 과거를 합리화하기 위해 독립운동 세력을 탄압하여 안정적인 정치적 기반을 다지려는 꼼수로 대한민국 현대사의 불행하고 부끄러운 역사가 아닐 수 없다.

(1) 6.25한국전쟁은 왜 일어났을까?

1945년 해방은 국기만 일장기에서 성조기로 바뀌었을 뿐이다.
1945.8.15, 해방은 미국 점령군에 의해 국기만 일장기에서 성조기로 교환됐다.

6.25한국전쟁은 우리힘으로 해방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본 제국주의와 미국 제국주의가 만들어 놓은 지정학적 이해관계가 얽히고 설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역사적 사건일 수도 있다.

4.3사건 관련 성지

당시 이승만 정권은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발생한 4.3사건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노인, 어린이, 부녀자 포함) 등 30,000여명을 학살했고 동족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며 4.3사건 출동명령을 거부한 여수의 14연대를 진압하면서 군경에 의해 민간인 2,500여명이 학살됐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건물
당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건물

그리고 1948년 9월 7일 국회에서 재석의원 141명 중 103명 찬성으로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됐고, 반민족행위자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되었다.

1949년 6월 6일, 이승만은 경찰 50여명의 동원하여 정부조직인 반민특위 본부를 강제 해산시킴으로서 친일청산을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그리고 친일청산을 뭉갠 현대사의 치욕적인 6월6일을 현충일로 지정하여 가장 엄숙한 날로 둔갑시켰다.

한편 1947년7월2일, 과도정부입법의원은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모리간상배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했으나 미군정청의 반대로 공포하지 못했다.

6.25 한국전쟁
6.25한국전쟁

이상과 같은 사건 등이 북측에 “우리가 친일 앞잡이들을 몰아내고 남녘동포들을 구하자”라는 빌미를 주어 민족상잔(民族相殘)이란 참혹한 6.25한국전쟁으로 비화된 것은 아닐까?

이는 불행한 과거사(過去事)지만 아이러니하게도 6.25한국전쟁은 친일 부역자가 신분을 세탁하고 대한민국의 애국자로 변신할 수 있는 또 다른 기회가 되었다. 하필 백범 김구 선생 서거 1주년이 되던 첫 제삿날 새벽에 6.25한국전쟁이 발발했을까? 

 

(2) 민간인을 학살한 이승만의 두 얼굴

클릭하면 이승만의 실체를 동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승만은 6.25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틀 뒤 27일 새벽 4명의 수행원만 데리고 객차 2량만 달린 3등열차를 타고 대전으로 피난갔다.

6.25 당일, 정부가 발표한 포고문, 외출을 삼가하라고
6.25 한국전쟁 당일 발표한 정부 포고문

대전에 도착한 이승만은 라디오방송을 통해 서울시민은 "안심하라, 적은 패주하고 있다" 며 27일, 수 차례에 걸쳐 라디오로 방송했다.

“서울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시오. 적은 패주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 - 1950.6.27 이승만 라디오 육성방송 어록 -

대통령의 라디오방송으로 많은 서울시민들은 피난을 포기했다. 마치 세월호의 구내방송("승객 여러분은 현재 위치에서 움직이지 마시고 가만히 계시길 바랍니다"/13차례)처럼 생사의 위기에서 피난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빼앗은 부분이 일치한다. 이와 같이 역사는 반복된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셈이다.

한강 인도교

대다수의 서울시민들은 속았지만 정부와 군, 경찰 고위직과 국회의원들은 이승만이 피난했다는 소식을 알고 일제히 가족과 함께 서울을 탈출했다. 그리고 방송 다음날 6월 28일 새벽 2시 28분경,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여 서울시민의 피난길을 차단했다.

3개월 후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이 수복되자 군경은 공산군 치하에 버려졌던 서울시민을 상대로 부역, 친공, 북한협력 등의 혐의를 씌워 처형하면서 그들의 후손에게 연좌제까지 부과시켰다.

이처럼 전쟁이 발발하자 제일 먼저 서울시민 몰래 도망쳐서 거짓방송으로 시민들을 속이고 한강교를 폭파하여 서울시민의 피난길을 막은 이승만은 서울을 수복한 후에 수많은 서울시민을 공산군에 협조했다는 죄명으로 처형했다.

한편 6.25 한국전쟁으로 친일세력은 신분세탁을 위한 절호의 기회가 됐다. 그들은 친일 신분을 국가유공자로 둔갑시키는데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들은 보도연맹회원과 시국사범 등 수십만에서 수백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공산당에 협조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죄가 된 이유다. 그리고 민간인을 학살한 군경은 훗날 국가유공자로 변신하여 훈장을 받고 죽어서는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3) 민간인 학살자 주역 김창룡, 망나니 매국노가 국가유공자로

김창룡(개인묘지에서 대전현충원 국립묘지로 이장)

김창룡은 1940년 일본 관동군 헌병으로 복무하며 50여건의 조선독립군 토벌에  전과를 세우며 일본에 충성한 인물로 해방후에는 김구 선생 암살 및 민간인 학살의 배후로 지목된 인물이다.

또한 김창룡은 북한에서 반민족행위자로 2차례나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위기때마다 탈출에 성공한 후 월남하여 이승만 정권의 호위무사를 복무하며 보도연맹회원, 경남 민간인 학살, 제주도민 학살, 대전 산내 학살 등 한국판 킬링필드 주역으로 이승만의 총애를 받았다.

김창룡 사설묘지에 있던 묘비
김창룡 개인묘지에 있던 묘비

1956년 1월 30일 아침, 특무부대 출신인 허태영 대령 일행에게 피살되자 이승만은 김창룡에게 1계급을 특진시켜 중장에 추서했다.

그의 사설묘비는 당대 최고의 친일 역사학자 이병도가 썼다. “간첩오렬 부역자, 기타 등 2만5천여 명을 처단하여 방첩의 특수임무를 달성했다”라고 적었다.

일본에 충성한 인물로 수많은 애국지사와 죄 없는 수백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인간백정을 국립묘지로 이장하기 위해 법을 개정한 나라가 지구상에 또 있을까?

김창룡이 살해 된지 42년 후인 지난 1998년 2월 13일, 경기 안양시 석수동 개인 묘지에서 대전국립현충원 장군 제1묘역 69호로 이장했다.

2. 애국지사 한훈 선생을 내조한 유응두 여사

한훈 선생의 부인 유응두 여사(1890~1976)

이상과 같은 시대적 배경으로 일제강점기에는 일경의 탄압에 시달리고 해방 후에는 일제에 부역했던 친일 앞잡이들에 의해 어려움을 겪는 등 한만은 질곡의 세월을 이어온 한훈 선생의 아내 유응두 여사가 해방 23여년이 지난 1968년 3월 1일 추서된 건국훈장 국민장(독립장)을 먼저 간 남편을 대신하여 받았다. 한훈 선생의 독립운동이 뒤늦게 국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는 명예로운 순간이었다.

독립운동을 하던 그 시절 일경들이 두 눈에 핏발을 세우며 “남편이 있는 곳을 대라”며 모진 폭력과 고문으로 어깨뼈가 위골되고 부서져서 큰 흉터와 장애를 가졌다. 그래도 일경이 자신을 살려둔 것은 한훈 선생을 체포하기 위한 미끼라고 생각하며 험난한 세월의 고초를 감내하며 흐트러짐 없이 독립운동가의 아내로서 최선을 다했다.

남편이 옥살이를 할 때는 옥바라지를 했고 일경의 눈을 피해 무기를 나르기도 했다. 친정은 일경의 탄압으로 파탄됐지만 한훈 선생을 한 번도 원망한 적이 없다. 가족보다 국가가 우선이라는 투철한 국가관과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늦었지만 남편의 독립운동을 인정해준 국가에 감사하며 모질고 험난했던 지난 세월이 할머니의 머리에 주마등처럼 스친다. 애국지사인 남편에 대해 사랑과 감사의 눈시울을 적셨다.

손자들을 키우며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소리는 절대로 하지 마라. 독립운동 이야기를 함부로 했다가 너도 할메처럼 모진 꼴을 당할 수 있어”, “일본사람이 나쁘지만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 할메는 일본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지켜봤다.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잔꾀 부리지 않고 꾸준히 일을 하더구나. 그러니 남의 나라에 와서도 땅을 사고 부자가 됐던 거야. 우리나라 사람들도 15시간 이상 일하면 일본을 이길 수 있단다.”라며 손자를 훈육했다.

 

3. 애국지사 후손 한상빈씨의 모범적인 삶

한훈 선생은 슬하에 남매를 두었다. 딸은 1923년 종로경찰서를 폭파하고 수백 명의 일경과 교전 중 순국한 김상옥 의사 집안으로 시집가서 91세까지 장수했고 아들 세택씨는 6·25 한국전쟁 전에는 강경에서 사업을 했지만 부친인 한훈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신도안에서 어머니를 모시며 함께 살았다.

상빈씨의 어머니는 상회와 상빈씨 형제를 남기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를 잃은 상빈 씨는 엄마처럼 할머니와 정이 들었고 지금도 할머니의 유지를 받들며 살고 있다. 할머니는 냉철한 판단력과 강인한 인내로 국가관이 남달랐던 여장부로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서도 울거나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참여한 집안은 대부분 망했다. 가세가 빈궁하여 자식들을 가르칠 여유가 없어 가난이 대물림됐다. 이와 같이 어려운 삶의 역경에도 할머니는 자신의 어깨를 보여주며 할메는 이와 같은 고문도 이겨냈다. “아무리 어려워도 이런 고문보다 더 참기 어려운 일이 어디 있겠냐? 어려울 때 할메를 생각하라”며 용기를 북돋는 훈육을 받고 자란 상회씨와 상빈씨 형제는 이를 악물고 새로운 삶을 개척했다. 상회씨는 대전으로 나가 체육관을 운영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상빈씨는 신도안에서 학교를 다녔다. 서울 상급학교에 합격했지만 입학금이 없어 진학을 포기했다. 그리고 농사일을 도왔다. 군에 제대한 후 현재의 아내와 결혼했다. 아내인 남은신 여사는 천생연분이다. 1969년 결혼 후 1976년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실 때 까지 할머니와 함께 살며 하루 20시간씩 일을 했다.

축산업 초창기였던 당시 소, 돼지도 부지런히 키우고 누에도 10장 이상 사육하며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해서 억척스레 돈을 모아 해마다 땅을 넓혔다. 땅값은 비싸지 않은 시절이라 세월이 흐르다 보니 동네에서 농토가 제일 많은 부자가 되었다. 모두가 할머니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꾸준하게 실천한 결과이고 아내의 적극적인 내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한훈 선생 손자 한상빈씨(그가 살던 집터에 한훈기념관 개관/2021.8.15)

1983년 7월부터 계룡대 설치를 위한 620사업이 시작되어 신도안 주민 1,318세대 5,550명이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다. 당시 신도안 정장리에도 120여 세대가 살고 있었다. 한훈 기념관이 세워진 터가 한훈 선생 주거지로 상빈씨가 살던 집터다.

상빈씨는 논산시 광석면 신당리에 위치한 논산 갑부 윤희중씨가 살았던 집터와 그 일원을 대토할 지역으로 정하고 이주를 추진하여 목적을 달성했다. 할머니의 유지를 받들기 위한 의지였고 상빈씨의 가치관이었다.

지난날 한훈 선생이 독립운동을 함으로서 그의 아내인 유응두 여사는 일경의 고문과 폭행으로 어깨뼈가 부서지고 위골되는 고초를 겪으며 도피생활을 해야 했다. 이와 같이 어려운 환경에서 할머니와 식솔들을 거둬줄 온정의 손길이 필요했다.

그때 1907년에 결성된 “을사5적 암살단” 주요 멤버로 활동했던 윤이병 동지가 파평윤씨 종친인 윤 갑부에게 부탁하여 한훈 선생 가족들이 윤 갑부 집에 의탁할 수 있었다. 어려울 때 도와준 은혜를 평생 잊지 못하는 할머니의 유훈을 가슴에 새긴 상빈씨는 할머니의 유지를 받들었다. 독립운동가의 가문은 자신의 근본을 절대로 잊지 않는다.

1984년에 매입한 기와집, 현재는 꿀벌들의 낙원이다.(한상빈씨 영농일지) 

대지 1,000평에 한 채의 낡은 기와집을 1984년 봄에 2,300만원에 구입했다. 당시 강남 아파트 한 채 가격이 3천만 원이었으니 시골 땅값으로 엄청나게 비싼 가격이지만 주저하지 않고 매입을 결정했다. 

그 후 나머지 한 채(300평)도 몇 년 전 9천6백만 원에 매입했다. 상급하교 입학금도 없어서 진학을 포기했는데 평생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열심히 일을 한 결과 이제는 지역에서 대지주의 반열에 오를 정도로 성공을 했지만 아직도 주변 사람들은 상빈씨가 애국지사의 손자로서 역경을 극복한 삶의 여정은 잘 모른다.

 

4. 할머니의 유지를 받든 한상빈ㆍ남은신 부부, 나눔의 세월

한상빈ㆍ남은신씨 부부(논산시 광석면 신당리)

50여년 영농 일지를 쓰며 농사일에 몰입한 한상빈ㆍ남은신 부부는 어렵게 농사를 지었지만 이웃과 평생을 나누며 생활한다. 많은 농사를 짓다보니 자나 깨나 농장에서 살면서 취미가 농사짓는 일이고 보람은 이웃과 나눔을 통해 할머니의 유지를 받드는 일이다.

작목은 벼농사, 과수원, 그리고 양봉이다. 할머니의 유지에 따라 매년 수확하는 쌀 수백포를 신도안면과 광석면 등에 기부하여 이웃과 나눔을 실천한다. 이사 온 다음해부터 지금까지 지속하여 실천한 일이다.

지금도 할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어린마음(상빈씨)에 할머니에게 “그까짓 독립운동 해봤자 뭐해요. 보람도 없는 데...?”

할머니 “이놈아, 할아버지가 독립운동 하신게 우리집안 자식들 잘되라고 그런 줄 알아? 나라를 위한 일을 그렇게 속 좁게 말하는 것이 아니란다.”,

<그밖에 할머니 어록>

“어디 가서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소리는 절대로 하지마라. 할메처럼 모진 꼴을 당할 수 있어”

 “일본사람이 나쁘지만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 할메는 일본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지켜봤다.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잔꾀 부리지 않고 꾸준히 일을 하더구나. 그러니 남의 나라에 와서도 땅을 사고 부자가 됐던 거야. 우리나라 사람들도 15시간 이상 일하면 일본을 이길 수 있단다.”

 “네가 빚을 져가며 땅을 많이 장만한 것은 아주 잘한 일이다. 나라가 없으면 어디가 죽어도 하소연할 곳 없듯이, 네가 논밭이 없으면 자손들을 무슨 수로 먹여 살리겠냐?”

 “할메는 많은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신세를 졌다. 이와 같은 큰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최 부자가 우리를 도왔던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도와주는 것이다!”

평생을 독립운동으로 생사를 넘나들던 할아버지의 애국정신과 기상을 이어받고 할머니의 유훈을 가슴에 새기며 성장한 애국지사 한훈 선생의 손자 상빈씨는 밤과 낮 없이 노력과 정성을 다해 농사일을 했다. 오직 할머니의 유지를 받드는 것이 삶의 보람이다.

효자, 효부인 한상빈ㆍ남은신 부부가 수많은 역경을 극복하며 살아온 나눔의 세월은 세간에 훈훈하고 잔잔한 감동을 주는 한편의 드라마 같은 삶은 현재 진행형이다. 상빈씨 부부가 농사짓고 양봉하며 열심히 살아온 삶의 여정은 우리에게 삶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일깨우며 가슴에 찡한 여운을 남긴다.  

<참고 / 할머니 어록 등= 놀뫼신문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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