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랑 칼럼] 견벽청야(堅壁淸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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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랑 칼럼] 견벽청야(堅壁淸野)
  • 이정랑의 고금소통
  • 승인 2021.01.05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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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을 깨끗이 거둬들이고 보루를 지킨다.

이정랑 중국고전 평론가
이정랑 중국고전 평론가

『삼국지』 「순욱전 荀彧傳」에 이런 고사가 있다. 동한 말기 당시만 해도 조조의 실력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러나 몇 차례 전투에서 승리한 후, 특히 산동성 연주(兗州) 일대에서 여포를 격파한 후 그의 세력은 상당히 커졌다.

연주 근처의 서주(徐州)는 그 지세가 험한 요충지인 데다가 각종 산물이 풍부해서 조조는 진작부터 이 지방을 손에 넣고 싶어 했다. 그러나 서주를 지키는 도겸(陶謙)이라는 인물이 워낙 인심을 얻고 있는지라 한 차례 전투를 벌여보았지만 여의치 않았다. 그 뒤 도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조조는 곧 서주를 공격하려고 했다. 이때 조조의 모사 순욱(荀彧)이 반대하고 나섰다.

“연주 땅은 우리가 아직 기반을 잡지 못한 곳인 데다가 여포도 기회를 엿보고 있는 곳입니다. 우리가 군대를 동원하여 서주를 공격하면 내부가 텅 비게 되고, 그때 여포의 공격을 받으면 큰일입니다. 서주 공략이 만에 하나 실패로 돌아가는 날에는 우리는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순욱은 다음과 같이 상황을 분석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함께 제시했다.

“지금 도겸이 죽었다고는 하나, 우리가 이미 그쪽과 한 번 겨루어 보았기 때문에 그쪽 부장들은 우리에 대해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습격에 대비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분명 ‘견벽청야’의 전법으로 우리를 상대할 것입니다. 만약 공격하여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논밭의 식량도 거두지 못한다면 대단히 위험한 처지에 빠질 것이 뻔합니다.”

조조는 순욱의 분석을 듣고 일리가 있다고 판단, 서주 공격을 유보했다.

『진서 晉書』 「석륵전 石勒傳」에 나오는 이야기다. 서진(西晉) 말기, 후조(後趙)의 국왕 석륵은 몸소 군대를 이끌고 진(晉 )군과 전투를 벌였다. 진군은 싸우는 족족 패하여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다. 진군은 수춘(壽春-지금의 안휘성에 속함)에서 ‘견벽청아’의 전법을 취하여 적이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하도록 했다. 석륵의 군대는 식량을 얻지 못해 굶주리게 되었고, 급기야는 서로를 잡아먹는 극한 상황까지 벌어져 더, 이상 진군하지 못하고 후퇴하고 말았다.

뒷날 ‘견벽청야’는 전력이 우세한 적의 공격에 대항하는 책략이 되었다. ‘벽(壁’은 보루를 의미한다. 따라서 ‘견벽(堅壁)’은 보루를 굳게 지킨다는 뜻이 된다. ‘야(野)’는 논밭을 의미한다. 따라서 ‘청야(淸野)’는 논밭의 식량과 보관해둔 기타 물자를 깨끗하게 거두어들이거나 처리한다는 뜻이다. 이는 적을 굶겨 죽이거나 곤경에 빠뜨리는 작전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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