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이저 보고서] 박정희는 한국의 경제대통령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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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저 보고서] 박정희는 한국의 경제대통령이 아니었다.
  • 충청메시지 조성우기자
  • 승인 2017.11.14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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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백년전쟁] 프레이저 보고서 (동영상)

 

1976년 미국 대륙 전체가 박정희 때문에 큰 충격에 휩싸였다. 박정희 정권이 미국 국회의원들을 돈으로 매수하려던 사건이 발각된 것이다. 이것을 미국 언론들은 '코리아게이트 사건' 이라고 불렀다.

결국 1977년 2월 3일, 미 의회는 프레이저 의원이 이끄는 국제관계 소위원회에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그때부터 프레이저 위원회는 박정희 정권에 대해 샅샅이 파헤치기 시작했다. 다급해진 박정희는 민병권 장관을 청와대로 불렀다. 그리고 특명을 내렸다.

미국에 가서 김형욱이 프레이저 청문회에 나가는 것을 막아. 프레이저 청문회 3일 전 민병권은 김형욱을 찾아갔다. 김형욱... 그는 박정희와 함께 쿠데타를 일으켰고 오랫동안 중앙정보부 부장으로서 박정희에게 절대 충성을 바쳤던 인물이다.

그러나 박정희가 3선 대통령이 될 때 그는 큰 공을 세우고도 버림을 받았다. 그러자 김형욱은 배신감을 느끼며 미국으로 망명한 상태였다. 그런 김형욱에게 민병권은 회유를 시작했다. 원하는 모든 것을 보장해주겠다. 제3국으로 떠나라.

그러나 김형욱은 단호히 거부하고 워싱턴으로 떠나버렸다. 낙담한 민병권은 발길을 돌리며 김형욱의 아내에게 말했다. 형욱이에게 꼭 전해. 청문회에서 증언하면 제대로 못 살 줄 알라고.

1977년 6월 22일 프레이저 청문회... 김형욱은 미 국회에서 박정희 정권의 비밀들을 적나라하게 폭로했다. 그리고 2년 후 그는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된 후 살해됐다.

1978년 10월 31일... 드디어 프레이저 보고서가 의회에 제출됐다. 그런데 놀랍게도 박정희 집권 기간 전체가 조사돼 있었다.

게다가 한국의 경제성장에 관한 내용까지 있었다. 왜 한국은 그토록 빨리 성장할 수 있었을까? 그 비밀이 담겨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모든 것이 사실무근이라며 국민들을 속였다.

그런데 1년 후 박정희는 부하 김재규의 총탄에 살해됐다.(1979년 10월 26일)  이제 한국인들도 한국 경제성장의 진실을 알게 될 기회가 왔다.

그러나 곧바로 박정희가 키워놓은 군인들(전두환과 하나회)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들은 프레이저 보고서를 차단하며 박정희의 경제신화를 보호했다. 그렇게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그러면서 프레이저 보고서의 존재도 완전히 잊혀 버렸다.

한국은 아주 빠른 시간에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그 이유가 뭘까? 학자들은 수출주도형 공업화 전략이 핵심이었다고 분석한다. 그럼 이 전략을 제시한 사람은 누구일까?

박정희가 수출주도형 전략을 제시해서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준 걸까? 한국의 중장년층은 철석같이 그렇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프레이저 보고서는 박정희가 아니라고 말한다.

비밀이 해제된 미국 기밀문서들도 그가 수출주도형 전략을 제시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럼 도대체 누가 한국 경제를 성장시킨 걸까?

 

◈ 케네디의 남자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 이제 미국의 최대 적은 소련이었다. 소련은 주변 국가들에게 군사 원조와 경제 원조를 해주며 세력을 넓혀나갔다. 공산주의 팽창에 맞서기 위해 미국은 일본을 점령하자 즉시 개조작업에 들어간다. 미국식 정치제도와 문화를 빠르게 이식시켰다.

이와 동시에 미국은 “유럽과 아시아의 부흥을 위해 서독과 일본을 세계의 공장으로 만들겠다.” 이렇게 선언하고는 일본에 전폭적인 원조를 해줬다. 그러자 폐허가 됐던 일본 경제는 빠르게 복구되기 시작했다. 특히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전쟁 물자를 공급하면서 엄청난 고속성장을 이루었다.

하지만 한국의 상황은 정반대였다. 남한에 이승만 정권을 세워놨던 미국은 완전히 실패했다. 막대한 원조를 했지만 경제상황은 처참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이승만과 친일파 세력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했다. (4·19혁명 → 이승만 미국 망명)

이에 반해 공산주의 국가들의 경제 원조를 받은 북한은 3년 만에 전후 복구를 마쳤다. 그리고 천리마 운동(1956년)이라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서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어냈다. 결국 북한의 경제력은 세계 50위, 남한은 101위로 격차가 벌어졌다.

▲ 존 F. 케네디 대통령

이로 인해 미국은 위기감을 느꼈다. 가난한 한국인들이 북한을 부러워하다가 갑자기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키지 않을까? 미국은 매우 초조했다. 그때 한 남자가 나타났다. 젊고, 스마트하고, 섹시한 남자 존 F. 케네디. 그는 미국의 대외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꾸려고 했다.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는 전 세계 절반의 사람들, 집단적 가난의 사슬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그들을 도울 것을 맹세합니다.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계속 도울 겁니다. 공산주의 세력이 그렇게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가난한 국가들을 우리 편으로 만들려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그것이 옳기 때문입니다. <존 F. 케네디>

친미국가 개발 전략... 이것은 공산주의를 막기 위한 케네디 정부의 새로운 전략이었다. 유능한 케네디의 전략가들, 그들은 공산주의 국가가 계속 늘어나는 원인을 철저하게 분석했다. 그 결과 공산주의 혁명은 가난한 국가들에서 발생한다는 공통점을 발견했다.

따라서 공산주의라는 전염병을 막으려면 반드시 가난한 국가들의 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 이것이 친미국가 개발 전략의 핵심이었다. 이때 한국에 관한 긴급 보고서가 케네디에게 올라왔다.

남한 상황이 위험스러운 방향으로 악화되고 있다. 반정부 심리가 강력한 반미 감정으로 폭발해서 혁명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휴 팔리 보고서> 그리고 4월 11일, 서울의 매카나기 대사도 긴급 보고서를 올렸다.

4·19혁명 이후 남한에서 민족주의 감정이 일어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이 개입했다는 비난을 듣지 않으면서 남한의 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 <월터 매카나기 주한 미대사> 케네디는 즉시 매카나기를 미국으로 불렀다. 그리고 중대한 임무를 맡겼다.

매카나기의 책임 아래 한국문제 태스크 포스팀을 만들어라. 그리고 5월 15일까지 새로운 한국의 발전 전략을 담은 종합 보고서를 완성해라! 그것은 가난한 한국인들에게 축복 같은 소식이었다.

이때 새로 등장한 장면 정부도 경제부흥을 최우선 목표로 내걸었다. 그리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내놓고 가난한 국민들을 달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만약 미국의 새 전략에 따라 5개년 계획이 성공한다면 장면은 뛰어난 지도자로 존경받을 것이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은 장면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1961년 5월 16일, 쿠데타가 벌어지자 케네디는 즉시 박정희에 대한 조사를 지시했다. 그러자 다음 날부터 기밀 보고서가 올라왔다. 제일 먼저 케네디가 알게 된 정보는 박정희가 일제 때 한국 민족을 배신했던 친일파라는 것이다.

1944년 1월 박정희는 일본 군사학교에서 임관했다. 그리고 만주의 일본 군대에서 복무했다. 1949년 박정희는 체포되어 공산주의자로 판결을 받았다. 

이때 박정희는 약 300명의 동료들이 체포되도록 증거를 제공했다. 그 대가로 그는 사형을 면했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공산주의자로 활동하다가 체포됐다는 것이다. 

이때 박정희는 자신의 동료들을 전부 밀고해서 죽게 만들고 자신의 목숨을 건졌다. (남조선 노동당 – 남로당) 이 사건 때문에 미군들은 박정희를 뱀 같은 인간이라며 ‘스네이크 박’ 이란 별명을 붙였다.

쿠데타의 리더가 공산주의자였다니!!! 케네디와 참모들은 긴장했다. 그런데 희망적인 보고서들이 계속 올라왔다. 그들은 미국에 계속 의지하면서 우리에게 협조할 것 같다.

이런 보고서들을 보자 케네디는 여유를 되찾았다. 그는 쿠데타 때문에 연기했던 한국 문제를 논의하는 회의를 다시 열기로 결정했다.

1961년 6월 13일, 바로 이날 한국의 운명을 바꾸는 논의가 이루어졌다. 한국문제 태스크 포스팀이 작성한 종합 보고서... 국가기밀로 분류된 그 보고서는 미국이 한국을 발전시켜야 하는 이유로 3가지를 제시했다.

첫째, 북한 공산주의와의 대결에서 이겨야 한다.

둘째, 미국의 국가적 위신이 걸려 있다.

셋째, 특히 일본을 보호하는 데 중요하다.

결국 한국이 무너지면 일본이 위험해지고 미국의 태평양 방어 라인도 위태로워진다. 그래서 미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한국 경제를 발전시키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고서는 미국이 돈을 쏟아붓고도 한국을 발전시키지 못한 원인을 정확히 분석했다.

과거 미국의 원조는 군사안보 목적, 전후 복구, 한국인들의 최저 생계유지에만 사용됐다. 그런 뼈아픈 반성을 한 뒤 앞으로는 미국의 원조를 한국의 경제개발에 집중 투자한다. 케네디의 전략가들은 치밀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한국의 발전을 위해서는 행정개혁, 부패추방, 그리고 교육제도까지도 개혁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동안 한국의 교육이 유교적 전통에 따라 인문 분야만 중시하고 과학 분야를 경시했다. 따라서 국가 발전을 위해 과학 분야와 기술, 직업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1961년 6월 13일, 미국의 최고 엘리트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앉아 한국의 경제개발과 근대화 전략을 수립해버린 것이다. 

 

◈ 얍삽한 사무라이들 → 한국을 정복하라!!!

1961년 6월 20일... 케네디는 이케다 수상과 만났다. 그리고 한국의 경제개발에 일본의 참여도 필요하다. 빨리 한국과 국교 정상화를 하라고 당부했다. 그러자 이케다는 미국의 뜻에 협조하겠다고 답변했다. 그 뒤 일본 극우파 정치인들이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극우파의 거물 요시다 시게루 전 수상, 그도 미국에 와서 케네디와 한국 문제를 논의했다. 일본 극우파들이 한국 개발을 돕겠다고 나선 이유는 요시다 시게루가 자기 입으로 당당하게 밝혔다.

▲ 요시다 시게루

이건 농담이 아니었다. 그들은 한국을 일본의 경제 식민지로 만들겠다. 그런 원대한 계획을 갖고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해, 한국 경제를 일본에 의존적인 구조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일본 의존형 산업구조 → 일본 설비와 원자재로 상품을 만들고 번 돈으로 다시 일본 원자재를 수입하는 무한 반복 시스템을 확고하게 정착시킨다. 그런 얍삽한 구상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미쯔비시, 미쓰이 같은 일본 대기업들은 한국전쟁 후 10년 만에 얻은 절호의 기회라며 흥분해 있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일본은 친일파였던 박정희를 주시했다.

만약 그에게 뇌물을 준다면 그는 일본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줄 인물일까? 그들은 몹시 궁금했다. 워... 반공 포스터에 눈깔이 있을 줄이야...

미국과 일본이 주시하는 가운데 박정희는 미국의 독립기념일인 7월 4일에 반공법을 선포했다. 그것은 자신이 공산주의와 완전히 손을 끊었다는 메시지였다. 그리고 10월 31일... 박정희는 한 언론인에게 사형 판결을 내렸다. 조용수(민족일보 사장)에게 북한을 찬양했다는 누명을 씌운 것이다.

조용수는 재일 동포 북한 보내기 정책에 대해 반대 운동까지 벌였던 사람이다. 그는 억울한 누명을 쓴 채 31살의 나이에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47년 후... 무죄가 선고됐다. 그렇게 박정희는 무고한 사람을 살해하며 자신이 얼마나 과격하게 반공정책을 수행할 수 있는지 보여줬다. 이것은 미국인들에게 효과가 있었다.

1961년 11월... 미 정보계는 결론을 내렸다. 박정희가 더 이상 공산주의에 동조하거나 접촉하지 않을 것이다. <프레이저 보고서> 그리고 1961년 11월 11일... 박정희는 일본과 미국의 권력자들을 만나러 떠났다.

박정희가 공항에 내리자 일본 극우파들의 관심은 절정에 달했다. 그런데 박정희는 파격적인 행동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일제 때 만주군관학교에서 천황의 군인들을 양성했던 나구모 장군... 박정희는 그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나구모 선생님께서 저를 이렇게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건 정말 기대 이상이었다. 침략을 당했던 한국인에게서 고맙다는 말까지 듣다니! 극우파의 대부 기시 노부스케는 박정희를 요정에까지 초대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박정희는 일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혁명을 했을 때 일본 명치유신의 지사들을 떠올렸습니다. 저는 명치유신의 지사들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일본 명치유신의 지사들... 조선 침략의 선봉장 사이고 다카모리, 이토 히로부미, 박정희는 그런 침략자들에게 존경심을 표현한 것이다.

이제 일본 극우파들은 확신했다. 친일파 박정희와 손을 잡고 한국을 일본의 경제 식민지로 만들 수 있다. 그렇게 확신한 일본은 박정희 정권에 검은 돈을 주기 시작했다.

1961년부터 1965년까지 박정희의 공화당이 일본으로부터 받은 돈은 6천6백만 달러(현재 약 2조 1천억 원)다. <CIA Special Report> 이제 한국은 대일 무역적자의 수렁 속으로 빠지게 된 것이다.

 

◈ 수출주도형 국가의 탄생

박정희가 미국에 오기 10일 전, 케네디는 새로운 조직을 탄생시켰다.

 AID – 국제개발처, 이 조직의 임무는 친미국가 개발 전략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모든 분쟁 지역에 미국 군대를 파병하는 것을 우리는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당신들을 보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분쟁 국가의 국민들과 함께 일하면서, 그 나라의 경제를 발전시키는 임무를 수행할 것입니다. <존 F. 케네디>

결국 AID는 공산주의를 막기 위한 ‘경제 전문가 부대’ 였던 것이다. 1961년 11월 14일... 일본 방문을 마친 박정희가 워싱턴에 도착했다. 케네디는 일본과의 관계 개선에 적극적인 박정희를 밀어줄 생각이었다. 그래서 백악관에 초대까지 해준 것이다.

그런데 회담 도중 박정희는 특별 원조를 요청했다. 우리는 경제개발 계획서를 작성 중이다. 특별 안정 기금 2억 5천만 달러를 지원해 달라. 케네디는 내심 당황했다. 이미 그는 박정희의 경제개발 계획에 대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달 전, 미국 대사가 박정희에게 직접 경고를 보냈다. 그 경제개발 계획은 현실성이 없다. 몇몇 경제학자들이 수작업으로 만든 것임을 미국은 이미 파악하고 있다. <사뮤엘 버거 주한 미대사>

버거의 말은 정확했다. 박정희의 경제 참모조차 허술하게 작성했다고 인정할 정도였다. 그런 경제 계획에 케네디가 특별 원조를 해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실무진 회담에서 AID 처장은 미국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밝혔다.

이때부터 미국과 갈등이 시작됐다. 미국 경제 전문가들은 냉정하게 비판했다. 현실을 무시하고 설정한 7.1% 성장률은 지나치게 높다. 그리고 수출 전략도 없다. 사실 박정희에게도 수출 전략이 없었던 건 아니다.

박정희의 수출전략은 토끼털을 깎아 팔고, 생선을 많이 잡고, 돼지를 키워서 외화를 벌자는 논리였다. 즉, 수출 기업들을 집중적으로 육성해서 한국 경제를 성장시킨다. 그런 수출 확대 전략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미국 전문가들은 국민들 돈을 내자로 동원해서 종합제철소 같은 거대 산업시설을 짓겠다는 계획도 시기상조라며 비판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자신의 경제개발 전략을 바꾸지 않았다. 연평균 성장률 7.1%나 되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강력히 추진할 것을 결정하였다. (1961년 1월)

박정희는 자신만만했다. 자신의 성공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 때문에 그는 그동안 감춰왔던 자신의 생각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제 식민지 키드로 살았던 박정희... 그는 방송을 통해서도 자신의 생각을 당당하게 밝혔다.

과거 우리 민족은 너무나도 의타적이고 사대주의적이었으며 우리의 운명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개척하고 극복해 나가겠다는 자주적인 정신이 너무나도 결핍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박정희 육성>

그리고 3·1절이 되자 박정희는 <우리 민족의 나갈 길>이란 거창한 책을 펴냈다. 그런 다음 그는 바로 자신이 퇴행적인 한국 민족의 구원자이며 경제발전의 영도자임을 완벽하게 보여주기 시작했다.

1962년 5월... 증권시장이 파탄이 났다. 박정희 집권을 위해 그의 조카사위 김종필의 부하들이 정치자금을 마련하려고 사상 최대의 주식 사기를 친 것이다. 박정희의 조카사위 김종필은 사상 최대의 주가 조작을 저질러서 2천만에서 3천만 달러(현재 약 9천억 원)를 벌어들였다. <Memorandum From NSC To Kennedy>

김형욱의 증언에 의하면 이때 김종필이 긁어모은 돈의 일부는 박정희에게 상납됐고, 공화당 창당 작업(자금), 야당 교란작전에 쓰였다고 한다. 이것은 걸음마를 떼려는 한국 경제에 치명타를 안겼다.

증권파동이 벌어진 후 투자자들은 주식 시장에 대한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기업들은 주식으로 사업 자금을 마련할 수 없었다. 이 문제들을 완전히 극복하는 데 10년이 걸렸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박정희는 더 큰 사고를 쳐버렸다. 박정희는 사전조사도 안 해보고 기존 화폐를 폐기하고 새 화폐를 발행했다. (1962년 6월 10일 - 화폐개혁)

게다가 예금한 돈까지 자유롭게 인출하지 못하게 했다. 그 때문에 돈의 유통이 멈춰 경제가 마비되며 한국 전체가 대혼란에 빠져버렸다. 이런 광경을 바라보며 버거 대사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멍청한 짓을 저질렀다. <The Transformation of korea>

그때부터 미국은 박정희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들은 박정희에 대한 지지 정책을 심각하게 재고해야 한다... 그런 논의까지 벌였다. 이것은 박정희에게 최대의 위기였다.

지하자금을 동원해 경제개발에 쓰겠다며 화폐개혁을 했던 건데, 막상 저지르고 보니 지하자금은 몇 푼이 안 됐다. 그 대신 경제적 혼란과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다. 전체 공장의 절반 이상이 가동을 멈추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미국은 박정희에게 예금 동결을 해제하라고 압박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어떤 정책을 추진하건 미국과 사전에 협의해야 한다... 그런 요구까지 했다.

처음에 박정희는 거부했다. 미국이 한국 문제에 개입할 권한이 없다고 버텼다. 그러자 버거는 조용히 말했다. 당신이 더 이상 미국의 원조를 원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겠군.

그 말을 듣자 박정희는 태도를 바꿨다. 결국 박정희는 미국의 힘 앞에 굴복했다. 이제 미국이 동의해주지 않으면 어떤 경제정책도 자유롭게 추진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박정희의 참모들이 대거 물러나게 됐다. 1차 경제개발 계획을 추진했던 핵심 참모들도 전부 잘렸다. 그 뒤 새롭게 경제 관료들이 등장했다. 새로운 총리와 경제기획원장이 우리와 매우 협조적으로 일하고 있다.

그들은 미국의 뜻에 매우 협조적인 인물들이었다. 새 관료들은 1차 계획이 수정돼야 한다는 발언까지 내뱉었다. 박정희는 당황했다. 이미 진행 중인 계획까지 공격당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는 처절하게 저항했다. 오히려 개발계획의 규모를 확대해야 한다고 맞섰다.

그러자 미국은 전면에 나서 필살의 무기를 빼들었다. 한국 언론을 통해 박정희의 경제정책에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그 당시 한국은 미국의 원조가 끊기면 붕괴하는 나라였다. 

이 기사를 본 한국 국민들은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권력 유지를 위해 국민들의 지지가 필요했던 박정희... 결국 그는 미국의 힘 앞에 완전히 무릎을 꿇었다. 1962년 11월 26일... 이때부터 신임 경제 관리들이 1차 경제개발 계획서를 뜯어고치기 시작했다. 이때 미국은 비밀리에 구체적인 요구 사항을 전달했다.

종합기계제작소 같은 대규모 산업화 전략을 포기하라. 그리고 수출을 증대시키는 정책으로 전환하라. 미국은 인정사정이 없었다. 박정희 정권이 미국의 정책에 조금이라도 비협조적이면 미국은 곧바로 경제 원조 책임자를 한국에서 철수시키며 실력행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미국의 핵심 요구 사항이 전부 들어간 새로운 경제개발 계획서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미국의 적극적 개입과 지도를 받는 수출주도형 개발 전략으로 전환됐다.

 

◈ 채찍과 당근

사뮤엘 버거 주한 미대사... 그는 박정희를 좋아했다. 버거는 박정희를 잘 교육해서 미국의 목표를 실현시키는 대리인으로 써야 한다... 그런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 사뮤엘 버거 주한 미대사

그럼 미국은 어떤 수단으로 박정희를 교육하려 했던 걸까? 우리의 채찍과 당근 정책은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몇 분야에서 진전이 있었다. <The Transformation of Korea>

그렇다면 채찍 정책은 대체 무엇일까? 세금제도들을 개혁하라 → 시행하기 힘들다 → 원조 중단 → 언젠가 시행할게 → 당장 해!!! 9개월 동안 원조 중단 → 개혁 정책을 시행할게 그 결과 엄청난 세수가 엄청나게 증가했다. <Fraser Report>

그럼 당근 정책은 어떤 식으로 사용했을까? 1962년 화폐개혁의 실패를 기점으로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한 미국, 이제 미국의 다음 목표는 수출을 비약적으로 상승시키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한국의 환율 정책을 뜯어고쳐야 했다.

그 당시 한국의 환율은 비정상적으로 낮게 설정돼 있었다. 예를 들어 수출업자들이 1달러짜리 가발을 수출하면 133원 밖에는 못 받았다. 이 때문에 미국은 환율을 300원 대로 대폭 올릴 계획이었다.

그렇게 되면 가발을 하나 수출하면 곧바로 300원을 벌게 된다. 이익이 두 배로 뻥튀기 되는 것이다. 그럼 기업들이 수출에 목숨을 걸고 달려들게 된다. 결국 환율개혁은 한국의 경제구조를 수출주도형으로 바꾸기 위해 가장 필수적인 정책이었다. 그러나 장애물이 있었다.

박정희는 환율개혁에 거부감을 보였다. 수출에는 좋을지 모르나 반대로 수입품의 가격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1달러짜리 물건을 133원에 사다가 300원에 사 오게 되면 물가가 오르기 마련이다.

그럼 가난한 서민들의 불만이 커져 박정희의 인기가 떨어진다. 이 때문에 박정희는 환율개혁에 거부감을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미국이 채찍을 쓰지 않았다. 그 대신 환율 안정금이라는 먹음직한 당근을 제시했다. 그리고 밀고 당기는 협상 끝에 1달러 당 255원까지 올리는 데 성공했다. (환율 개정 - 1964년 5월 3일)

사뮤엘 버거는 이 협상 결과를 이렇게 기록했다. 박정희는 우리의 부추김을 받아서 물가인상의 위험과 맞서기로 결심했다. 환율은 인상됐고 5월부터 안정화 프로그램이 가동됐다. 그 결과는 매우 좋았다. 모든 부분에서 생산이 급속히 향상됐다.

연간 GNP 성장률이 1964년과 1965년에 걸쳐 6%에 달했다. 수출은 1964년 1억 2천만 불에서 1965년에 1억 7천만 불에 달했다. 이는 1961년과 대비해볼 때 6배나 많은 것이다.

이런 광경을 목격하며 박정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런 빌어먹을! 왜 내 결정과 반대로만 가면 수출이 늘어나는 거야? 그런 자책을 했을까? 아니면...

이제부터 미국 경제 전문가들한테 무릎 꿇고 배워야겠군... 그런 다짐을 했을까?

박정희는 둘 다 아니었다. 그는 기자들을 전부 불러 모았다. 그리고 카메라 앞에서 손가락을 휘두르고 노동자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수출품도 만져보며 부지런히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미친 듯이 손을 흔들며 외쳤다.

한국 민족의 갈 길은 본인이 제시한다!!! 가자, 수출 10억 불을 향해!!!

박정희의 전략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수출을 통해 조국이 무섭게 성장하는 광경을 감탄스럽게 바라보는 한국인들, 그들은 이 모든 것이 박정희의 지도력 덕분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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