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명 칼럼] 왜 사냐 건 그냥 웃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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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명 칼럼] 왜 사냐 건 그냥 웃지요
  • 이기명 팩트TV 논설위위원장
  • 승인 2020.08.20 0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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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두렵지 않은 나이

【팩트TV-이기명칼럼】 세상에는 귀신도 안 믿을 거짓말이 있다. 노처녀 시집가기 싫다는 말이다, 일찍 죽고 싶다는 늙은이 말이나 밑지고 판다는 장사꾼의 말. 며느리를 딸처럼 생각한다는 시어머니의 말도 멀쩡한 거짓말이다.

젊었을 때 그러니까 옛날이라고 해 두자. 그때는 죽을까 참 겁도 많이 났다. 그러나 이제 85세, 저만치서 죽음이 손짓을 하고 있다. 하도 손짓을 보니까 죽음이라는 것도 그렇게 멀리 있지 않은 것 같고 죽어도 그만이지 하는 달관 비슷한 심정이 됐는데. 그 말은 바로 겁이 없어졌다는 의미도 된다.

문득 김상용의 시가 생각난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 짧고 아름다운 시인데 그 시에 ‘왜 사느냐고 하면 그냥 웃지요.’라는 구절이 있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은 한참 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사진 출처 - 한국기독교총연합회 홈페이지)
(사진 출처 - 한국기독교총연합회 홈페이지)

■ 왜 사냐 건 웃지요

내 인생의 좌표를 설정해 주신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신 후 참 인생이 허망했다. 누가 뭐라 하든 존경하던 박원순 시장이 타계하신 후 세상 참 더럽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 사랑하던 언론계 후배가 세상을 떠났다. 산다는 게 우스웠다.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가. 허 참.

이명박에게 물어볼까. 박근혜에게 물어볼까. 요즘 인간 취급도 못 받는 전광훈에게 물어볼까. 너 왜 사니? 뭐라고 대답할까. 사람 속은 모른다는데 아마 울지도 모르지. 왜 자신들의 천국이 사라졌느냐고 속으로 통곡할지도 모른다.

그들의 천국은 오래전에 사라졌어야 했다. 그들이 살아 있을 때 국민들은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했는가. 살아있는 사람의 몸으로는 감당 못 할 고통을 겪었다. 그 고통을 보고 즐기며 그들은 웃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울어야 한다. 아니 울고 있을 것이다. 그럼 고통받던 국민들은 웃는가.

인간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고통의 행진이 시작된다. 태어나는 순간의 울음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고통을 슬퍼하는 엘레지(Elegy.비가)라고도 한다.

과거를 되돌아본다. 얼마나 많은 눈물과 한숨이 있었던가. 얼마나 많은 기쁨과 웃음이 있었던가. 슬픈 기억들이 너무나 많다. 모두가 인간들 스스로가 만들어 낸 슬픔의 늪이다. 아니 오늘의 현실에서도 인간이 겪는 고통은 자기 스스로 만든 것이다.

목사라고 하는 전광훈에게 묻는다. 도대체 왜 그러고 사느냐. 코로나바이러스 퍼트리려고 사느냐. 지금 이 글을 쓰는 시간에 전광훈을 재구속하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20만을 넘었다고 한다. 검찰은 전광훈의 보석을 취소하라고 법원에 청구했다. 잘못된 보석 취소 청구인가. 전광훈이 코로나19에 감염됐다고 하는데 빵에 가기 싫어서 거짓말 하는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과 어깨동무하고 대통령의 목을 자른다고 호기 있게 떠벌리는 전광훈. 어떤가. 코로나바이러스 앞에서 한 마디 해야지. 누구를 감염시키느냐고 말이다. 참 ‘나쁜 놈’이다.

 

■ 용서는 고백이 먼저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이 왜 자신들의 잘못을 모르랴. 경찰 앞에서 도둑이 죄를 자백하면 정상이 참작된다. 고백은 힘들다. 그러기에 감동이다. 많은 정치인의 고백이 있다. 국민이 믿는가. 왜 믿지 않는가. 경험이다. 그들의 거짓이 국민의 신뢰를 마비시켰다.

전광훈의 죄의 대해 미통당의 비판이 없다. 하고 싶어도 못 하는가. 전광훈과 연단에 서서 아양 떨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서인가.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 김종인이 주호영과 나란히 서서 과거를 반성하고 용서를 빈다면 국민이 뭐라고 할까. 욕을 할 것인가. 아니다. 국민은 그렇게 모진 사람들이 아니다. 용서를 비는 전제는 진실한 자기고백이다.

민주당도 같다. 지지율 하락에 속 끓이기만 하면 되는가. 잘못을 고백해야 한다. 질척거렸던 청와대와 당 대표부와 정부는 국민이 원하는 수준 훨씬 이상으로 고백을 하고 사과를 하고 용서를 빌어야 한다. 국민이 믿어야 용서를 받는다.

술을 끊은 지 몇십 년이 지났다. 그런데도 안 믿는다. ‘그 친구가 술을 끊어? 개가 똥을 끊지.’ 그 친구는 바로 나다. 어떻게 믿게 하는가. 도리가 없다. 정치인들의 거짓말도 같다. 무슨 소리를 해도 멍멍이다. 얼마나 슬픈 일인가. 신뢰의 바탕 위에서 정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희망이 없다.

곽상도가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을 사과하고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던 윤석열이 그 모습으로 돌아간다면 정치 불신이 사라질까. 그것은 교훈이다. 이완용의 역적질도 교훈이 되는 것과 같을 것이다.

 

■ 코로나바이러스와 죽음

목줄에 매어 산책하는 강아지만 봐도 가슴이 아프다. 얼마나 답답할까. 전광훈이 코로나19에 감염되어 병원에 입원했다는데 왜 이렇게 통쾌한가. 전광훈은 내게 강아지만도 못한 동물인가?

늙은이가 무슨 할 일이 많아서 매일 나가느냐고 아내가 꾸중한다. 코로나19가 더욱더 기승을 떤다니까 늙은 서방님 혹시나 걸릴까 걱정되는 모양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마누라밖에 없다. 60년 함께 한 아내를 볼 때마다 온갖 후회가 떠오른다. 얼마나 속을 많이 상하게 했던가. 지금 내가 떠나면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한날한시에 둘이 똑같이 죽는다면 그런 걱정이 없겠구나 하다가 진짜 늙어서 별 걱정을 다 한다는 생각이 든다.

살만큼 살았다고들 한다. 인간의 욕심이 끝이 있으랴만 오래 살았다. 그러나 마지막 소원이 남았다. 아직 ‘사람사는 세상’이 오직 않았다는 생각이다. 죽기 전에 그런 세상이 올 것인가. 와야 한다. 아니 그런 세상이 온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국민들이 이만하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세상이 와야 한다. 그게 ‘사람사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을 보고 죽어야 한다. 언제나 올 것인가.

아직은 죽어도 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아직 할 일이 많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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