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리 칼럼] 부끄러운 강남- 태영호 선택, 시대정신 거부
상태바
[에드워드 리 칼럼] 부끄러운 강남- 태영호 선택, 시대정신 거부
  • 에드워드 리(Edward S. Lee) 
  • 승인 2020.04.25 08: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재미동포 에드워드 리(Edward S. Lee) 선생이 SNS에 올린 북한 외교관 출신 태구민(태영호, 미래통합당)후보가 강남갑에서 헌정 이래 최초로 국회의원 당선에 따른 논평이다.

강남은 '돈'을 택했다. 부끄러운 선택이다. 완고하게 시대정신을 거부하고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 셈이다. 저들은 우월감으로 국민 정서를 폄훼할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폐해다. 그렇게 지난 한 세기를 군림해 온 미국의 현실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그들에게 '사람'은 없다. 강남도 마찬가지다. 사람을 위한 시스템이 없는 커뮤니티다. 이것이 오늘 그들이 마주한 비극이다. 코로나19 사태가 길어지면 협력이 아니라 폭동이 일 게다. 강남이 새겨야 할 대목이다.

세계 금융의 허브, 뉴욕에서 매일같이 천여 명씩 사람이 죽어 나간다. 돈을 산처럼 쌓아두고도 생명을 지키지 못하는 사회, 주검에 대한 예의는커녕 시신을 아무렇게나 방치, 외딴섬에 버리고, 전염병이 두려워서 사재기와 총기류를 구입하는 사회에 어떤 희망이 있을까?

돈으로 안 되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면서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주지만, 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마치 트럼프나 강남처럼. 코로나 사태가 인류에게 주는 교훈은 '협력'이다. 협력은 가슴을 요구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사람보다 돈을 우선한다. 생명이 처절하게 죽어 나간다.

인명을 경시하고 자본을 숭상하는 사회에서는 늘 폭동이 있었다. 볼셰비키 혁명이 그렇고, 프랑스혁명이 그러하며, 전봉준의 민중봉기도 마찬가지다. 미국인들이 총포로 무장하는 데서도 엿볼 수 있다. 돈을 쌓아놓고 두려움에 떠는 바보들이다.

90년대 초 LA에서 폭동이 일어났을 때 약탈과 방화가 도시를 파괴했다. 원인은 인종차별이었지만, 폭동이 거세지면서 약탈을 일삼은 것이다. 그들의 의식 속에 잠재된 '차별'이 혐오를 불러 결국 폭력으로 드러난 것.

인간과 인간이 더불어 살면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차이'. 그 차이에서 비롯되는 사회악적인 요소들을 최소화하고자 공동체 사회는 윤리, 도덕을 가르치고 배려와 관용을 중요한 덕목으로 여긴다.

거기에 강제성을 띤 법적 장치까지 더해진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사회의 '안전망'이다. 이는 사람을 근간으로 한 관습과 제도다. 그런데 사람을 경시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이런 관습이나 제도가 기능할 수 있을까?

태영호 같은 자를 내세우고, 또 그를 뽑아준 것은 부끄러움을 넘어 천박하고 미개한 행태다. 그들에게는 사람이 없다. 코로나 사태가 인류에게 물었으나 북미 유럽 선진국들은 오답을 냈다.

유럽 국가들은 좀 다를 줄 알았지만, 그들 역시 아시안을 무시하며 오만에 빠져 국민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 이것이 미개한 인류가 자행하고 있는 현실이다. 문재인 정부의 '사람이 먼저'라는 휴머니즘과 대한민국의 깨어난 시민 지성을 제외하고 말이다. 지구촌이 뒤늦게 인식, 포스트 코로나19 시대의 대한민국을 주목하는 이유다. 세계 질서는 이렇게 '사람'을 대하는 척도로 갈린다.

사람은 본성이 쉬 바뀌지 않는다. 필자가 오랫동안 미국에 살면서도 한국을 응원하는 것처럼. 특히 나이가 들면 향수가 깊어져 고향을 돌아본다. 이는 자연현상이다. 인간은 자연의 지배를 받는다. 태영호를 다 믿을 수 없는 이유다. 그런데 그가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는 알다시피 북한의 인텔리 가문 출신의 고위 공직자였다. 그 유전자는 쉬 바뀌지 않는다. 기우이기를 바라지만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셈이다.

강남은 트럼프처럼 미개한 선택으로 인간을 상실했다. 그 대가는 혹독할 것이다. 이미 그렇게 굳어진 유전자로는 협력과 상생의 시대를 살아가기는 어려울 것. 자연주의의 삶을 요구하는 코로나19가 아니어도 상생은 시대정신이다.

사람들은 협력해서 필요한 돈이나 물질을 갖출 수 있지만, 돈으로 사람을 살 수는 없다. 그렇게 굳어진 심장으로 '사람'을 회복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북미 유럽의 민낯이 바로 강남의 모습이다. 그들은 이웃이 정을 나눌 때 총을 들고 경계할 사람들이다. 이웃을 적으로 의심해야 하는 세상이라니 이런 불행이 또 어디 있나?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복지사회가 화두지만, 이를 위한 사회 대타협을 완고하게 거부한 것. 사회 참여를 거부한 그들의 ‘부’란 결국 민중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다. 그들의 돈은 금고에 있을 게 아니라 끊임없이 순환되어야 옳다. 기부든, 공장을 돌리든 돈은 사회에 환원돼 기능해야 한다. 이를 거부하면 물리적인 충돌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는 개체로서 존엄한 존재다. 그러므로 누구나 제 삶을 살아야 한다. 부모의 돈이나 축내면서 사는 것은 참다운 인생이 아니다. 이웃과 더불어 나누고 협력하는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숭고한가? 미국이나 강남은 삶의 가치를 모르는 종(種)이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