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 칼럼] 교과서에도 나오지 않는 대구 10·1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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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 칼럼] 교과서에도 나오지 않는 대구 10·1사건
  • 김용택 참교육이야기
  • 승인 2020.02.15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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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을 폐지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픈 역사. 차마 입에 올리기조차 부끄럽고 참혹하고 가슴 아파 덮어두기 위해서일까? 그런 역사를 진상규명도 보상도 하지 못하게 침묵하게 하는 법. 부끄러운 역사는 진상을 밝혀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하자는 게 역사를 배우는 이유 중의 하나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 아픈 역사, 부끄러운 역사를 감추고 덮어두기 위해 국가보안법까지 만들어 감추어두는 것일까?

5천년의 역사를 함께 살아 온 민족의 반쪽,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도대체 왜 이 반쪽에 대해서는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게 할까? 거기도 사람이 사는 곳인데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을터인데... 있는 그대로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서로를 도와주는 것인 반쪽이 하나 되는 길이거늘... 반성조차 하지 않은 일본과는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을 체결하고 우방국이라면서... 최근 대법원이 일본 기업의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 책임을 확정 판결한 후 일본의 배상거부로 소원해지기는 했지만 남북관계와는 비교할 바가 아니다.

부끄럽고 아픈 역사, 제주 4·3항쟁과 여·순항쟁, 보도연맹사건, 대구 10·1사건, 거창양민학살사건... 중 제주 4·3항쟁의 경우는 미흡하기는 하지만 상당부분 밝혀지고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까지 받아냈다. 그러나 여·순항쟁, 보도연맹사건, 대구 10·1사건, 국민방위군 사건과 같은 사건은 아직도 금기사항이다. 왜 그럴까? 당시의 가해자가 지금도 정치·경제, 사회·문화 법조계, 학계, 언론계에 시퍼렇게 살아 있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들의 과거가 드러나지 못하게 감추기 위해서가 아닐까?

 

<교과서에서조차 빼버린 대구 10.1 사건>

- 사건의 발단 -

우리가 ‘10월 대구폭동’으로 알고 있는 ‘대구 10.1 사건’은 1946년 10월 1일, 미군정 영역인 대구부 지역에서 시작된 민중봉기를 말한다. 대구사건이라는 이름 때문에 사람들은 대구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아는 사람들이 있지만 사실은 대구·경북 인근 지역으로 전파되면서 점차 남한 전국각지로 퍼져나갔고 무려 200만명이 참가해 3개월 동안 지속되었던 사건이다.

이 사건의 근본원인은 일제 강점기의 지배 체제가 그대로 유지된 미군정과 군정청의 식량정책 실패, 가혹한 수매, 미군정 경찰과, 서북청년단, 극단주의 반공청년단의 일반인 사냥 등으로 민심이 흉흉하게 된 분노에서 비롯된다. 1946년 전국에서 발생한 콜레라의 확산을 막기 위해 교통을 차단하고, 더욱이 큰 홍수로 대체 농작물마저 부족하여 식량문제는 더욱 악화되었다.

 

-경과 -

전국에서 9월 총파업이 진행되는 가운데 10월 1일 대구역 앞에서 경찰이 전평 계열 노동자들의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포하여 노동자가 사망하는 일이 일어났다. 다음날 시민들이 대구부청과 경찰서를 포위하고 경찰의 사과와 책임자의 처벌을 요구하며 점거하였다. 이후 대구 전역에서 시민들이 경찰과 우파 인물을 공격하여 사망자와 부상자가 대거 발생하였다. 미군정은 질서를 잡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하고 진압에 나서 오후에는 겨우 질서를 회복하였다.

대구에서의 항쟁은 진압되었으나, 빠른 속도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10월 3일부터 성주·칠곡·영천을 비롯한 경상북도 대다수의 지역에서 항쟁이 일어났으며, 경상남도에서도 통영을 시작으로 진주·마산을 비롯한 대다수의 지역에서 항쟁이 일어났다. 충청 지역에서도 10월 초순에 항쟁이 일어났으며, 10월 하순까지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에서 일어났다. 10월 하순부터 11월 초순까지 전라남도에서, 12월 중순에는 전라북도에서 항쟁이 일어나는 등 제주도를 제외한 남한 전역에서 항쟁이 일어났다.

항쟁에 참여한 시민과 농민들의 요구는 다양하였다. 도시에서는 식량배급 실시의 요구가 가장 많았으며, 농촌에서는 식량공출의 반대, 소작료 3·7제 실시 요구가 가장 많이 제기되었다. 일부 농촌지역에서는 토지의 무상몰수와 무상분배를 요구하였다. 도시와 농촌지역에서 공통적으로 친일파의 배격과 처단, 정권을 인민위원회로 이양하라는 요구가 나왔다. 항쟁 양상은 지역마다 조금의 차이가 있었지만, 대체로 군중들이 경찰서와 면사무소를 비롯한 관공서를 공격하고 점거하는 양상을 보였다. 공격 대상은 경찰관과 군정 관리, 우파 성향의 인물이었다.

- 결과 -

항쟁이 남한 전역으로 확산되자 미군정은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항쟁이 예상되는 지역의 인민위원회와 농민조합의 지도자를 예비 구금하거나 지역마다 진압 조직을 만들었다. 항쟁 지역이 광범위하여 미군과 경찰력이 분산되자 청년을 비롯한 우파 세력을 진압에 적극 동원하였다.

지역에서 항쟁이 발발하면 미군과 경찰을 즉시 파견하여 진압하였다. 항쟁이 격렬하게 전개되고 진압 방식도 무자비하여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다. 특히 항쟁 과정에서 경찰과 우파 인물이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 경찰과 우파 세력의 보복이 많았다. 아울러 우파 세력의 테러 때문에 많은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였으며, 물적인 피해도 상당히 컸다.

항쟁이 발발한 후 미군정과 중도파 세력의 대표는 항쟁의 원인을 규명하고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한미공동회담을 열었다. 한미공동회담은 항쟁의 원인을 경찰에 대한 민중의 적대감, 군정 내부의 친일파 존재, 일부 한국인 관리의 부패, 남한의 최대 복리를 방해하는 선동 등이라고 밝혔다.

대책으로 군정 내부의 친일파의 처단 등을 미군정에 권고하였다. 정부에서는 이 항쟁으로 희생된 사망자 20명, 중상자 50명 행방불명자 30명, 민간인이나 경찰관 측 사망자가 각각 40명이 넘었으며, 수백명의 부상자와 5,000여 명이 검거 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1982년 북한의 조국통일사가 발행한 ‘주체의 기치에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에 따르면 미제는 1만여명의 노동자와 1만2천여 명의 농민을 위시하여 10월 항쟁에서 무려 25,000여명의 애국적 인민들을 무참히 학살하고 15,000여명을 검거 투옥하였다.

어떤 지방에서는 애국적 인민들을 산채로 손발을 잘라 죽이기도 하고 임신부의 배를 갈라 죽이기도 했다. 항쟁기간 적통치기관이 파괴되고 인민위원회가 복구되어 행정권이 일시적이나마 인민들의 손에 장악되었고, 미제의 앞잡이인 악질경찰과 반동분자들이 인민들의 손에 의하여 처단되었다. 이는 남조선인민 투쟁의 역사적인 쾌거‘라고 발표했다.(뉴스타운 참고)

국가 보안법이 시퍼렇게 살아 있고 미국이 혈맹이요, 천사의 나라(?)이기 때문일까? 일제의 패망 후 미군정기 3년간, 찬탁과 반탁운동을 비롯한 여·순항쟁, 대구 10·1사건,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분단의 씨앗이 된 동아일보 오보사건... 등 어느 것 하나 명쾌하게 밝혀진 게 없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바로 미군정기의 미국이 한 일을 감추기 위해서는 아닐까? 부끄러운 역사를 감추고 덮어둔다고 사라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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