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랑 칼럼] 득주전제(得主專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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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랑 칼럼] 득주전제(得主專制)
  • 이정랑의 고전탐구
  • 승인 2019.12.16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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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로부터 지휘권의 독립을 얻는다.

손빈이 내세운 ‘승장(勝仗.-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에 관련 다섯 가지 계략 중의 하나가 ‘득주전제’다. ‘손빈병법’ ‘찬졸(簒卒)’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항상 승리할 수 있는 데는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 군주의 신임을 얻어 마음껏 지휘하면 이긴다.

둘째, 도를 알면 이긴다.

셋째, 대중을 얻으면 이긴다.

넷째, 좌우가 화합하면 이긴다.

다섯째, 적의 계략을 헤아리면 이긴다.

이정랑 언론인 (중국고전 연구가)
이정랑 언론인 (중국고전 연구가)

‘득주전제’에서 ‘전제(專制)’는 지휘권의 독립을 인정받아 임기응변하며 제약을 받지 않음을 가리킨다. 장수가 군주의 신임을 받아 독립된 지휘권을 보장받으면 이긴다. 이와 동시에 손빈은 승리할 수 없는 다섯 가지 요소도 지적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득주전제’와 반대되는 것이 ‘어장(御將)‘이다.

장수가 외지(전장터)에서 지휘권의 독립을 얻지 못하고 위기 상황에서 결단을 내릴 권리를 갖지 못한 채 군주에 의해 원격 조종을 받는다면 승리 할 수 없다.

이 책략은 군주와 장수 사이의 통치 관계가 전쟁의 승부에 미치는 작용을 말하고 있다. 이 용병 사상도 ’손자병법‘ ’구변편‘에 일찍이 언급되어 있다. 손자는 이렇게 말한다.

“장수는 군주의 명을 받아 군대를 모은다. ‧‧‧‧‧‧군주의 명령이라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있다.” 전쟁터의 상황은 수시로 변하기 때문에, 장수는 독립된 지휘권을 가지고 임기응변으로 결단을 내리고 상항에 따라 적절히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행사해야 비로소 정확하고 적절하게 지휘해서 승리를 확보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군주가 중간에 나서서 견제하게 되면 장수는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어 패배는 불을 보듯 뻔하다.

한나라 전반기의 명장 주아부(周亞夫)는 문제(文帝) 후원(后元) 6년(기원전 158년), 세류(細柳.-지금의 섬서성 함양 서남쪽 위수 북쪽 기슭)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었다. 그의 군대는 군령이 엄격해서 황제인 문제도 군령이 아니면 진영 안으로 들어올 수 없을 정도였다.

이것은 ‘장수가 외지에 나가 있으면 군주의 명을 받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다. 문제는 그 일로 주아부를 나무라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를 ‘진짜 장군’이라며 칭찬했다. 기원전 154년, 주아부는 오초(吳楚)난을 석 달도 안 되어서 평정했다.

‘구당서’ ‘열전‧54’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이다. 755년, 안사의 난이 터진 후 반군은 일거에 당나라의 동쪽 수도 낙양을 공격하여 함락한 다음, 계속 동관(潼關)으로 진격하여 장안을 위협했다. 이때 당나라 현종은 가서한(哥舒翰)을 병마부원수로 삼아 20만 대군을 지휘하여 동관을 지키게 했다. 가서한은 적의 예봉을 몇 차례 꺾음으로써 전세를 안정시켰다.

다음해 6월, 반격할 수 있는 전략적 조건이 미쳐 무르익지도 않은 상황에서 현종은 그저 이기려는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가서한‧곽자의‧이광필 등의 정확한 건의를 묵살하고 간신배 양국충(楊國忠)의 무고만 듣고는 가서한을 윽박질러 출격하게 했다.

가서한은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출격했으나, 영보(靈寶.-지금의 하남성 영보)를 막 지나려는 찰라 적의 복병으로부터 기습을 받고 20만 대군이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 결과적으로 동관을 지키지도 못했고 장안도 함락되고 말았다.

현종은 사천으로 피난 갔고, 안사의 난은 그로부터 8년이라는 세월 동안 지루하게 계속되었다. 이것은 군주가 중간에서 ‘장수를 견제한’ 결과였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지도부의 통일을 강조했다.

전쟁터에서 창칼이 부딪치는데 정책 결정이 궁중에서 이루어져서는 안 되며, 기회는 순식간에 변하므로 계략은 궁중의 천리 밖인 전장에서 결정되어야 한다. (‘육선공전집(陸宣公全集)‧권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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