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랑 칼럼] 선덕화이유원인(宣德化而柔遠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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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랑 칼럼] 선덕화이유원인(宣德化而柔遠人)
  • 이정랑의 고전탐구
  • 승인 2019.11.17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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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으로 어루만져 사방을 회유한다.

이는 명나라 성조(成祖)가 시행한 외교 정책의 골자다. ‘밖으로 사이(四夷)를 어루만지는’ ‘외무사이(外務四夷)’를 통해 친목‧우호 관계를 돈독히 함으로써, ‘사이가 따르면 곧 중국이 편해진다’는 ‘사이순즉중국녕(四夷順則中國寧)’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정랑 언론인 (중국고전 연구가)
이정랑 언론인 (중국고전 연구가)

당나라 태종은 일찍이 ‘중국이 편안하면 사이가 모두 절로 복종한다’는 ‘안녕중국(安寧中國), 사이자복(四夷自服)’이라는 외교 정책을 펼쳤다. 당은 대내적으로 문무 양 방면을 고루 닦고 내정을 개선하며 경제를 발전시켜 자신의 힘을 키운 다음, 사방의 이웃에 대해서 ‘덕으로 어루만져 사방을 회유’해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명나라 성조는 태조의 유언에 따라, 중국을 침략하여 괴롭히는 외구와 북쪽에서 일어난 강적 ‘첩목인조(帖木儿朝)’에 대해서는 ‘막는다’는 ‘방(防)‘을 기본 방침으로 하여 바닷가 군민들에게 개인적으로 그들과 통교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시켰다.

그와 동시에 회유 정책에 더욱 힘을 기울여 ’사해가 한 집안(사해일가 四海一家)‘, ’모든 것을 평등하게 사랑함(일시동인 一視同仁)‘, ’많이 보내고 적게 받음(후왕박래 厚往薄來)‘,과 ’서로를 성실하게 대함(이성상대 以誠相對)’, ‘귀하고 새로운 물건을 사들임(무채침이 貿菜琛異)’, 등을 대외 교류의 기본 조항으로 삼아 주도적이면서도 적극적으로 사이와 조공 무역을 전개해나갔다.

정화(鄭和)가 일곱 차례서쪽 바다를 행해한 것은 성조가 펼친 ‘회유’ 외교의 이정표였다. 성조 영락(永樂) 3년(1403년)부터 선종(宣宗) 선덕(宣德) 7년(1432년)까지 무려 30년 동안 정화는 일곱 차례 서쪽 바다를 항해하면서 37개국을 돌아다녔다.

그의 발자취는 남양 군도를 두루 거쳐 멀리는 동아프리카까지 미쳤다. 정화가 이끄는 함대는 배의 숫자가 2백여 척에 수행 인원과 병사들이 2만 7천에 이르렀다. 가장 큰 배의 규모는 길이 148m, 폭 50m에 이를 정도였다. 정화는 해외를 돌아다니면서 명나라의 국위를 다른 땅에 떨치는 한편 우호 관계를 전파했다.

명나라 성조의 성공적인 외교 전략은 명나라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각국과의 우호 관계가 증진되어 경제‧문화 교류가 촉진되었을 뿐 아니라, 명이 주체가 되어 국제적인 평화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16국의 사신 1천2백 명이 동시에 명을 방문하는 엄청난 외교 잔치가 벌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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